렌즈는 왜 예술이 되는가?

폐렌즈를 통해 개인과 세상을 말하다

뒤샹이 ‘샘’을 전시하기 전까지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더러운 변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샘’이란 이름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놓았을 때 우리는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신선한 충격과 전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술적 경험이 안경 렌즈를 통해서도 구현되고 있다. 바로 이선미 작가의 작품이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한낱 버려진 폐렌즈에 불과한 그것이 예술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가공되자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비추는 또 하나의 통로로 아우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버려진 안경 렌즈를 통해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이선미 작가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빛과 굴절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시선

이선미 작가의 창작 과정은 매우 치밀하다.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기까지 작품 구상에서부터 구조적 설계와 수학적 배열, 굴절률에 따른 배치, 렌즈의 가공, 조명과 빛의 구도 등 복잡한 작업을 전개한다. 보통 사람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은 되려 단순하다. 빛과 굴절이 만들어낸 그 ‘세계’를 우리는 그저 ‘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는 것을 통해 경험하는 그 세계는 때로 아름답고 황홀하며, 때로 아프고 슬프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서는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발견할 때 색다른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가령 그의 작품 중 ‘나 지금 여기’가 그렇다. 굴절률에 따라 배열된 렌즈의 벽을 따라가다 보면 흐릿했던 내 모습이 점차 선명하게 비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많은 타자와 사회의 시선 속에 갇혀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찾는 과정의 형상화다. 또 다른 작품인 ‘달항아리’의 경우 렌즈로 만들어진 항아리가 반사하는 빛이 벽에 거대한 우주를 그려 넣는 것을 보여준다. 개개인의 시간이 담긴 렌즈가 거대한 우주를 만드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한 사람의 가치와 우주의 가치가 동일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선미 작가는 이러한 작업에 대해 “나에게 있어 안경은 그 사람이다. 그것으로 나는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듯, 다른 모습을 하고 있듯, 다른 굴절을 가지고 있는 안경렌즈를 모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 때로 얽히고, 때로 기대기도 하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들이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만든다”고 말한다. 렌즈 속 개인의 역사를 모아 완성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것이 이선미 작가의 예술이다.

예술가의 시선

이선미 작가가 본격적인 미술가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본래 세공을 했던 그는 사람을 탐구하는 방편으로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재능과 사유를 담은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한가람 미술관 초대전, 뉴욕 갤러리 개인전, 베를린 아트페스티벌 등 다양한 전시를 통해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아온 이선미 작가는 벌써 활동경력만 2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20년간 오로지 안경 렌즈에 천작해 작품 세계를 펼쳐온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안경은 착용한 이의 눈이다. 타인과는 나눌 수 없는, 온전히 개인만의 시선이 되어주는 매개체. 하여 렌즈는 개인이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이며, 렌즈 표면의 흠집 하나조차 개인의 삶의 습관까지 담아낸 시간의 흔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 사용한 역사가 담긴 폐렌즈에 집중해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코자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작품을 살펴보다 보면 개인의 내밀함에서부터 사회속 관계에 대한 성찰까지 다양한 지점을 목도하게 된다. 특히 ‘관계’와 ‘사회’에 있어 그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은 ‘바람무리’라는 작품이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추모를 담은 이 작품은 렌즈를 바탕으로 나비와 연등 모양을 형상화해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와 영원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남겨진 이들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많은 고민과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작품을 준비했다”고 회고하는 그의 말은 사회와 관계 속에 개인이 가지는 책임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

현재는 한국의 전통적인 조형물을 모티브로 새로운 창작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선미 작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렌즈 속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그것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소망. 아직 코로나19의 여파로 작가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쉽진 않지만, 하루빨리 전시를 통해 그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 이선미 작가의 작품 활동을 위한 폐렌즈 지원 의사가 있으신 안경사께서는 협회(02-756-1001(내선 221))로 연락 바랍니다.